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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조 사네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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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산조 사네토미는 막부 말기부터 메이지 시대에 걸쳐 활약한 일본의 공가 출신 정치인이다. 그는 교토 조정의 중신으로, 존왕양이 운동을 주도하며 메이지 유신에 기여했다. 메이지 정부에서는 태정대신, 내대신을 역임했고, 1889년에는 임시 내각총리대신을 지냈다. 1891년 인플루엔자로 사망했으며, 국장으로 장례가 치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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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조 사네토미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산조 사네토미, 1880년대 후반경
산조 사네토미, 1880년대 후반 경
관직 정보
작위공작
칭호정1위
훈장대훈위 국화대수장
훈1등 욱일대수장
내대신재임 기간: 1885년 12월 22일 ~ 1891년 2월 18일
전임: 신설
후임: 도쿠다이지 사네쓰네
임시 내각총리대신재임 기간: 1889년 10월 25일 ~ 1889년 12월 24일
전임: 구로다 기요타카
후임: 야마가타 아리토모
태정대신재임 기간: 1871년 9월 13일 ~ 1885년 12월 22일
전임: (空位)
후임: 폐지
우대신재임 기간: 1869년 8월 15일 ~ 1871년 9월 13일
외국사무총독재임 기간: 1868년 2월 10일 ~ 1868년 2월 18일
귀족원 의원재임 기간: 1890년 2월 ~ 1891년 2월 18일
인물 정보
출생일1837년 3월 13일
출생지교토, 야마시로국
사망일1891년 2월 18일
사망지도쿄, 도쿄부
정당무소속
배우자산조 하루코
자녀산조 기미요시
산조 긴테루
가와바타 사네히데
간인노미야 고토히토 친왕비 지에코
모리 미사코
오타니 쇼코
히라마쓰 다카코
다카쿠라 아쓰코
마쓰나가 스에코
양자히가시산조 기미야스
가문 정보
가계고조부: 산조 스에하루
고조부: 하치스카 시게타카
고조부: 야마우치 도요시게
고조부: 모리 시게타카
증조부: 산조 사네오키
증조부: 이치조 데루요시
증조부: 야마우치 도요요
조부: 산조 기미오사
조부: 야마우치 도요쓰구
아버지: 산조 사네쓰무
양아버지: 다카쓰카사 스케히로
형: 산조 기미무쓰
동생: 가와바타 사네후미
인척사위: 간인노미야 고토히토 친왕
사위: 모리 모토아키라
사위: 오타니 고엔
사위: 다카쿠라 아쓰마로
손자: 산조 사네토미
손자: 산조 사네하루
증손자: 산조 기미타다
현손: 다케다 쓰네야스
현손: 마에다 도시스케

2. 생애

1854년 형 긴무쓰가 요절하면서 가독을 승계하였다. 공가 출신 존왕양이파로서 메이지 유신 이전부터 막부에 존왕양이를 강력히 권고하였다. 이후 반막부 운동에 뛰어들어 각 번을 돌며 반막부 세력을 규합하는데 힘썼다.[1] 1862년 시마즈 히사미쓰가 상경하자 산조 사네토미는 활발한 활동을 시작하여, 국사서기 어용에 임명되어 조정의 중추에 관여할 수 있게 되었다. 본래 사네토미는 공무합체론자였으나, 전혀 쇄국으로 나아가지 않는 막부에 대한 불만을 품고 존왕양이파 지사들과 교류를 깊게 하였다.

1863년 9월 30일의 쿠데타로 비교적 온건한 아이즈사쓰마 세력이 권력을 잡자, 조슈로 도망쳤다.

1867년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사임한 후 교토로 돌아왔다. 1868년 1월 3일, 메이지 정부의 최초 행정 기구(''산쇼쿠'')인 ''소사이''(총재), ''기조''(행정), ''산요''(의정관)가 설립되었다. 1868년 6월 11일, 태정관이 설립되면서 이 기구들은 폐지되었다. 새로운 메이지 정부에서 산조는 ''기조''의 수장, 우대신(1868년 6월 11일 ~ 1871년 8월 15일)을 역임하였다.

1871년 폐번치현 당시, 우대신 산조 사네토미는 도쿄에 있던 번지사 56명에게 칙어를 읽었다.

内には億兆の衆生を保護し、外には万国と対峙せんとす。茲に藩を廃し県と為し、苟も姑息の政を除くの外、務めて更張の道に就き、以て政令一途に出ることを期し、宜しく天下をして進むべき所を知らしむべし|안으로는 억조의 백성을 보호하고, 밖으로는 만국과 대치하고자 한다. 이에 번을 폐하고 현으로 만들어, 구차하고 임시방편의 정치를 없애는 것 외에, 힘써 고쳐 새롭게 하는 길에 나아가, 정령이 한 곳에서 나오도록 하고, 천하로 하여금 나아가야 할 바를 알게 해야 한다.일본어

같은 해 태정대신이 되었다. 이 태정대신은 율령 하의 것과 달리 천황의 대행자로서의 직책이며, "만기조공에 결정"되는 체제를 목표로 하였다. 다만 사네토미의 역할은 스스로 정책을 주도해 나간다기보다는, 조정역이나 밸런스 유지자로서의 면이 컸다. 이토 히로부미는 사네토미가 백관에게 존중받았으며, 한 번도 악평이 일어난 것을 들은 적이 없다고 회상하고 있다.

1873년 정한론이 대두되어 사이고 다카모리, 이타가키 다이스케를 비롯한 정한파와, 이와쿠라 도모미오쿠보 도시미치 등의 반대파가 대립하여 정부기능이 마비되자 이와쿠라를 대리하여 정부업무를 관장하였다.

1885년 태정관 제도가 폐지되고 제1차 이토 내각이 들어서자, 천황의 보좌역인 내대신이 되었다.

1889년 구로다 내각 당시 외무대신 오쿠마 시게노부가 외무정책에 불만을 품은 우익 단체의 테러로 부상을 입어 정국이 혼란에 빠지자, 구로다 기요타카 총리가 사임하였다. 이때 내각이 총사퇴하지 않고 메이지 천황의 명에 따라 산조가 내대신 겸 총리대신이라는 직함으로 '산조 잠정 내각'을 유지하였다.[1] 이후 내각총리대신의 "임시 겸임"이나 "임시 대리"가 제도적으로 정착되면서, 산조의 총리 겸임에 얽힌 배경은 점차 과거의 특별한 예외로 취급받게 되었다.

1891년 사망했으며, 국장으로 장례가 치러졌다.[1] 그의 묘는 도쿄 분쿄구고코쿠지에 있다.

하라다 나오지로의 초상화

2. 1. 가계와 출생

교토 조정의 증우대신이었던 아버지 산조 사네쓰무( 三条実万일본어)와 도사번주 야마우치 도요카즈( 山内豊策일본어)의 딸인 기코(紀子) 사이에서 태어났다.[1] 1854년 형 산조 긴무쓰( 三条公睦일본어)가 요절하자 가독을 승계하였고, 부인은 관백을 역임한 다카쓰카사 스케히로( 鷹司輔煕일본어)의 딸인 하루코(治子)이다.[1]

1837년(덴포 8년) 산조 사네토미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1] 어릴 적 이름은 후쿠마로(福麿)였다.[1] 정실 야마우치 노리코의 아들이었지만, 넷째 아들이었기 때문에 산조 가문의 서류인 하나조노 킨후사의 양자가 될 예정이었다. 어릴 때부터 총명하다고 알려졌으며, 후쿠마로의 교육 담당이었던 유학자 토미타 오리베의 영향으로 존황 의식이 높았다.[1]

안세이 원년(1854년) 2월, 둘째 형이자 산조 가문의 후계자였던 산조 긴무쓰가 요절했다.[1] 킨무츠에게는 적자 킨교가 있었고, 원래라면 킨교가 이어받아야 했지만, 토미타 오리베의 강력한 추천으로 4월에 후계자가 되었다.[1] 8월에 원복하고 실미(実美)라고 칭했다.[1] '미(美)' 자를 사용한 이름은 본래 '요시' 또는 '하루'로 읽지만, 사네토미는 이를 꺼려 유학자 이케우치 다이가쿠의 권유로 '실미'는 '사네토미'로 읽게 되었다.[1] 또한 이 때 킨교를 양자로 맞이했다.[1]

사네토미는 보오의 밀지 발급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막부로부터 박해를 받게 되었다.[1] 안세이 대옥 상황에서 사네토미는 정식으로 산조 가문의 가독을 상속했지만, 이듬해 1859년(안세이 6년) 4월에는 사네토미가 출가 및 근신에 처해졌고, 10월에 사망했다.[1]

2. 2. 막말의 정치 활동

1854년 형 긴무쓰가 요절하면서 가독을 승계하였다. 공가 출신 존왕양이파로서 메이지 유신 이전부터 막부에 존왕양이를 강력히 권고하였다. 이후 반막부 운동에 뛰어들어 각 번을 돌며 반막부 세력을 규합하는데 힘썼다.[1]

1862년 시마즈 히사미쓰가 상경하자 산조 사네토미는 활발한 활동을 시작한다. 5월 10일에는 히사미쓰의 의견을 수용하는 동시에 관백 구조 나오타다를 즉시 퇴임시키고 구례에 얽매이지 않고 관백을 선택해야 한다고 상소를 제출했다. 다음날에는 국사서기 어용에 임명되어 조정의 중추에 관여할 수 있게 되었다. 본래 사네토미는 공무합체론자였으나, 전혀 쇄국으로 나아가지 않는 막부에 대한 불만을 품고 있었다. 이 시기에는 히라노 구니오미의 『배복론』을 필사하는 등 존왕양이파 지사들과 교류를 깊게 했다.

7월부터 8월에 걸쳐 공무합체파 공경이었던 내대신 구니노미야 다케미치, 이와쿠라 도모미를 비롯한 사간 이빈을 격렬하게 공격하여 실각시켰다. 게다가 부친의 양녀를 아내로 맞이한 도사 번의 야마우치 요도에게 호소하여, 번주 야마우치 도요노리와 함께 상경시켜 도사 번을 중앙 정계로 진출시켰다.

8월에는 조슈 번과 도사 번이 14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에게 쇄국을 다시 독촉하는 칙사로 사네토미를 파견하도록 운동을 시작했다. 8월 10일, 사네토미는 쇄국 독촉을 위한 칙사를 재파견하는 의견서를 제출했고, 10월에는 칙사의 정사로서 부사인 아네코지 긴토모와 함께 에도로 향했다. 12월 9일에는 국사 어용 담당이 설치되었고, 사네토미는 그 일원이 되었다.

1863년 1월 23일, 친 사쓰마파의 관백 곤노에 다다히로는 사네토미 등의 공격을 견디지 못하고 사직하였고, 조슈번사를 많이 드나들게 했기 때문에 "조슈 관백"이라고 불린 다카쓰카사 스케히사가 다음 관백이 되었다. 2월 20일에는 가쿠슈인에서 배우는 공가들에게 초야의 지사들이 시사를 현현하는 것이 허용되어, 공가들이 존왕양이파의 영향을 더욱 강하게 받게 되었다. 2월 22일에는 존왕양이파 공가의 추대로, 장군 후견직인 히토쓰바시 요시노부에게 쇄국 기한을 주청하게 되었다. 이 교섭역으로 선택된 사네토미는 요시노부를 격렬하게 몰아세워, 4월 중순을 쇄국 기한으로 하는 언질을 얻었다.

이후 친막부 세력에 의해 체포되어 3년간 연금생활을 하였다.[1]

2. 3. 칠경 낙향과 조슈 번

교토에서 태어난 산조는 존왕양이("천황을 존경하고 오랑캐를 몰아내자") 운동의 중심 인물이 되었다.

분큐 3년 (1863년) 1월 23일, 친사쓰마파의 관백 곤노에 타다히로는 사네토미 등의 공격을 견디지 못하고 사직하였고, 조슈번사를 많이 드나들게 했기 때문에 "조슈 관백"이라고 불린 다카쓰카사 스케히사가 다음 관백이 되었다.[1] 2월 20일에는 가쿠슈인에서 배우는 공가들에게 초야의 지사들이 시사를 현현하는 것이 허용되어, 공가들이 존왕양이파의 영향을 더욱 강하게 받게 되었다.[1] 2월 22일에는 존왕양이파 공가의 추대로, 장군 후견직인 히토쓰바시 요시노부에게 쇄국 기한을 주청하게 되었다. 이 교섭역으로 선택된 사네토미는 요시노부를 격렬하게 몰아세워, 4월 중순을 쇄국 기한으로 하는 언질을 얻었다.[1]

다카쓰카사 관백은 고령으로 자신감이 부족한 면도 있었기 때문에, 사네토미 등 존왕양이파 공가에게 저항할 수 없었고, 사네토미는 "관백 전하조차 때로는 굴종한다"라고 말해질 정도의 권세를 자랑했다.[1] 이 상황을 우려한 쇼렌인노미야야마우치 요도가 사네토미를 설득하도록 의뢰했지만, 효과는 없었다.[1] 당시에는 존왕양이파 지사들의 활동이 과격해져서, 사네토미의 스승이었던 이케우치 다이가쿠조차 살해될 정도였다. 사네토미는 요도에게 지사들이 강하게 쇄국을 종용하는 상황을 설명하며, "나의 처지를 짐작해 주십시오"라고 호소했다.[1] 2월 21일 사네토미는 기소에 임명되었고, 병을 이유로 사퇴하겠다는 뜻을 밝혔지만 허락되지 않았다.[1]

3월 4일에는 장군 이에모치가 상경했고, 사네토미 등 존왕양이파는 압박을 강화했다. 3월 11일에는 가미가모 신사・시모가모 신사에 쇄국 기원을 행차, 4월 11일에는 이와시미즈 하치만구에 행차하여, 쇄국을 종용하는 장군에 대한 압력이 되었다.[1] 이와시미즈 행차 당일, 고메이 천황은 어지럼증으로 연기를 요청했지만, 사네토미는 허락하지 않고, 억지로 면회를 강요하여 가짜 병인지 물었다고 한다.[1] 마침내 5월 10일로 쇄국을 결행하기로 약속했고, 그 날 고메이 천황에게 "초토가 되어도 개항하지 않는다"라는 칙서를 내렸다. 시마즈 히사미쓰마쓰다이라 슌가쿠・야마우치 요도 등 공무합체파는 교토를 떠났고, 조슈번과 존왕양이파에 의해 교토는 거의 장악되었다.[1] 그러나 이 상황에 대해서는 고메이 천황조차 불쾌감을 나타내게 되었고, 존왕양이파 공가를 "폭론의 당상"이라고 부르게 되었다.[1]

막부는 존왕양이파 공경의 수장인 산조 사네토미와 아네노코지 긴토모의 회유를 꾀했지만, 산조 사네토미에 대해서는 효과가 없었다. 한편 아네노코지는 오사카에서 가쓰 가이슈와 논쟁을 벌인 적이 있어 개국에 기울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1] 5월 20일 밤, 산조 사네토미와 아네노코지는 함께 고쇼를 퇴출했고, 산조 사네토미는 가마쇼렌인궁 저택으로 향하기 위해 헤어졌다. 그 직후 북쪽으로 향하던 아네노코지는 사쿠헤이몬 밖에서 암살당했다. 산조 사네토미는 쇼렌인궁 저택을 향해 동쪽으로 향하고 있었지만, 가신이 수상한 인물을 목격했다. 가신의 토다 우타(후의 오자키 미쓰라)는 실제 시간보다 늦은 시간을 알려 산조 사네토미에게 방문을 포기하게 하고 귀가시켰다.[1] 자택에서 아네노코지 조난의 소식을 들은 산조 사네토미는 즉시 아네노코지 저택으로 문병을 갔다.[1]

아네노코지 암살범으로 지목된 것은 사쓰마번의 다나카 신베에였다. 조슈번과 산조 사네토미는 사쓰마번 배제 움직임을 보였고, 게다가 조슈번이 직접 조정에 헌금할 수 있도록 조치했다.[1] 그러나 고메이 천황은 산조 사네토미에 의한 사쓰마번 배제 움직임은 "거짓 칙명"이며, 즉시 산조 사네토미와 도쿠다이지 사네미치를 "조속히 제거"해야 한다고 쇼렌인궁에 전했다.[1] 권세의 정점에 있던 산조 사네토미였지만, 사쓰마번의 조사에 따르면 산조 사네토미는 과격파의 언행에 휘둘려 이제 와서 의견을 바꿀 수도 없다고 한탄했으며, 각기병이 심해져서 저택에 틀어박히는 일이 많아지고 "출가하고 속세를 떠나고 싶다"고 말했다고 한다.[1]

1863년 9월 30일의 쿠데타로 비교적 온건한 아이즈사쓰마 세력이 권력을 잡자, 그는 조슈로 도망쳤다.

2. 4. 메이지 유신과 신정부

산조 사네토미는 교토 조정의 증우대신이었던 사람의 아들로 태어났다. 공가 출신의 존왕양이파로서 메이지 유신 이전부터 막부에 존왕양이를 강력히 권고하였고, 반막부 운동에 뛰어들어 각 번을 돌며 반막부 세력을 규합하는데 힘썼다. 1863년 9월 30일의 쿠데타로 비교적 온건한 아이즈사쓰마 세력이 권력을 잡자, 조슈로 도망쳤으나, 1867년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사임한 후 교토로 돌아왔다.

1868년 1월 3일, 메이지 정부의 최초 행정 기구(''산쇼쿠'')인 ''소사이''(총재), ''기조''(행정), ''산요''(의정관)가 설립되었다. 1868년 6월 11일, 태정관이 설립되면서 이 기구들은 폐지되었다. 새로운 메이지 정부에서 산조는 ''기조''의 수장, 우대신(1868년 6월 11일 ~ 1871년 8월 15일)과 태정대신(''다이조다이진'')(1871년 8월 15일 ~ 1885년 12월 22일)을 역임했다.

1873년 정한론이 대두되어 사이고 다카모리, 이타가키 다이스케를 비롯한 정한파와, 이와쿠라 도모미오쿠보 도시미치 등의 반대파가 대립하여 정부기능이 마비되자 이와쿠라를 대리하여 정부업무를 관장하였다. 산조는 태정대신 시절 명목상 정부의 최고직에 있으면서 조정역을 맡았으나 이토 히로부미의 주도로 1885년 태정관 제도가 폐지되고 제1차 이토 내각이 들어서자, 천황의 보좌역인 내대신이 되었다.

2. 5. 태정대신 시기

1871년 신정부의 최고 직위인 태정대신이 되었다.[1] 또한 화족령에 의해 귀족 최고위인 공작위를 수여 받았다.

1873년 정한론이 대두되어 사이고 다카모리, 이타가키 다이스케를 비롯한 정한파와, 이와쿠라 도모미오쿠보 도시미치 등의 반대파가 대립하여 정부기능이 마비되자 이와쿠라를 대리하여 정부업무를 관장하였다. 산조는 태정대신 시절 명목상 정부의 최고직에 있으면서 조정역을 맡았으나 이토 히로부미의 주도로 1885년 태정관 제도가 폐지되고 제1차 이토 내각이 들어서자, 천황의 보좌역인 내대신이 되었다.

메이지 4년(1871년) 7월 14일 (1871년 8월 29일) 폐번치현 당시, 도쿄에 있던 번지사 56명이 니시노마루 어전의 자진전 대광간에 소집되어, 그들에게 우대신 산조 사네토미가 폐번치현을 선포하는 칙어를 읽었다.

内には億兆の衆生を保護し、外には万国と対峙せんとす。茲に藩を廃し県と為し、苟も姑息の政を除くの外、務めて更張の道に就き、以て政令一途に出ることを期し、宜しく天下をして進むべき所を知らしむべし|안으로는 억조의 백성을 보호하고, 밖으로는 만국과 대치하고자 한다. 이에 번을 폐하고 현으로 만들어, 구차하고 임시방편의 정치를 없애는 것 외에, 힘써 고쳐 새롭게 하는 길에 나아가, 정령이 한 곳에서 나오도록 하고, 천하로 하여금 나아가야 할 바를 알게 해야 한다.일본어

여기서 말하는 "유명무실한 폐단"은 한 나라가 여러 번으로 분단되는 봉건주의를 가리킨다.

같은 해의 제도 개혁으로, 태정대신이 되었다. 이 태정대신은 율령 하의 것과 달리 천황의 대행자로서의 직책이며, "만기조공에 결정"되는 체제를 목표로 하였다. 다만 사네토미의 역할은 스스로 정책을 주도해 나간다기보다는, 조정역이나 밸런스 유지자로서의 면이 컸다. 이토 히로부미는 사네토미가 백관에게 존중받았으며, 한 번도 악평이 일어난 것을 들은 적이 없다고 회상하고 있다. 이 해 11월 21일에는 이와쿠라 사절단의 파견이 이루어졌고, 사네토미는 유수정부의 수장으로서 시마즈 히사미쓰로부터의 압력, 태정관제의 개혁, 타이완 출병 문제, 조선과의 국교 문제 등 다양한 문제에 대응하게 되었다.

2. 6. 총리대신 임시 겸임

1889년 구로다 내각 당시 외무대신 오쿠마 시게노부가 외무정책에 불만을 품은 우익 단체의 테러로 부상을 입어 정국이 혼란에 빠지자, 구로다 기요타카 총리가 사임하였다. 이때 내각이 총사퇴하지 않고 메이지 천황의 명에 따라 산조가 내대신 겸 총리대신이라는 직함으로 '산조 잠정 내각'을 유지하였다.[1] 이는 새로운 헌법상으로는 위법이었으나, 당시 일본 제국 헌법이 제정은 되었지만 아직 공포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했다.

산조는 총리대신의 직권 강세가 조약 개정 교섭 문제의 혼란을 초래했다고 보고, 내각 직권을 내각 관제로 개정하여 당면 과제를 해결했다. 같은 해 12월 24일, 내무대신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총리대신으로 임명되어 제1차 야마가타 내각이 성립되자, 산조는 "병고"를 이유로 사직서를 제출하고 내각총리대신 겸임에서 면직되어 내대신 전임이 되었다.[5]

이 기간 동안 하나의 내각이 존재했던 것으로 간주하여 이를 "'''산조 잠정 내각'''"이라고 부르기도 한다.[4] 이후 내각총리대신의 "임시 겸임"이나 "임시 대리"가 제도적으로 정착되면서, 산조의 총리 겸임에 얽힌 배경은 점차 과거의 특별한 예외로 취급받게 되었다. 오늘날에는 이 2개월 동안 "내대신 사네토미가 내각총리대신을 겸임했다"고 하면서도, 그것은 "구로다 내각의 연장"이며 "사네토미는 역대 내각총리대신에 포함하지 않는다"는 것이 연구의 추세가 되었다.[6]

2. 7. 사망

산조는 1891년에 사망했으며, 국장으로 장례가 치러졌다.[1] 그의 묘는 도쿄 분쿄구고코쿠지에 있다.

3. 평가

산조 사네토미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지만, 대체로 그의 온화한 성품과 조정 능력, 그리고 덕망을 높이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이토 히로부미는 산조를 "관대하고 도량이 넓어 많은 사람을 포용하는 그릇"이자 "대의를 지키고 굴하지 않는 절개를 지닌 분"으로 묘사하며, "조야(朝野) 모두 중망(衆望)을 걸었고, 공에게는 한 번도 나쁜 비평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라고 회상했다.[9] 오무라 마스지로는 "한 마디도 비난할 곳이 없다, 달걀을 깐 듯한, 정말 훌륭한 정신의 분"이라고 평가했다.[10]

시부사와 에이이치는 산조를 "인의(仁義) 사람"으로 평가하면서도, "지극히 원만하고, 보이는 모습은 아무래도 다정해 보였지만, ... 내면에는 꽤나 강골스러운 면이 있는 분"이라고 평했다.[11] 또한 정책에는 통달하지 못했고, 무정견(無定見)이었다고 지적하며, 특히 경제 문제에 있어서는 더욱 그러했다고 평가했다.[11] 유수 정부 시절, 대장대신이었던 이노우에 가오루와 시부사와가 정부 지출 문제로 참의와 대립했을 때, 산조는 시부사와의 저택을 세 번 방문하여 "(이노우에를) 너무 시끄럽게 하지 않도록 해달라"고 의뢰했다는 일화는 그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11]

혼다 타츠지로는 산조를 3천 년에 한 명 나올까 말까 한 대인물이라고 극찬하면서도, 현명한 듯하면서도 범용적인 면모를 보여 그 윤곽을 파악하기 어렵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출처와 진퇴가 분명하고, 사이고 다카모리오쿠보 도시미치와 같은 뛰어난 영웅들을 조종한 점을 높이 평가했다.

이토 히로부미는 산조의 학문과 예술적 재능에 대해서도 언급하며, "학문도 하셨고, 노래는 상당히 잘 지으셨다. 특히 필적은 매우 훌륭한 것으로, 운무비동(雲霧飛動)의 묘(妙)를 갖추고 계셨다"라고 평가했다.[9]

1871년 8월 29일 폐번치현 당시, 도쿄에 있던 번지사 56명에게 칙어를 읽은 이가 바로 산조 사네토미였다. "''내(內)로는 억조(億兆)의 백성을 보호하고 외(外)로는 만국(萬國)과 대치하고자 한다. 이에 번(藩)을 폐하고 현(県)으로 삼아, 부질없는 것을 제거하고 간결하게 하며, 유명무실한 폐단을 제거하고, 다시 강기(綱紀)를 펴고, 정령(政令)을 하나로 통일하여, 천하로 하여금 나아갈 바를 알게 한다''" 라는 내용으로, 여기서 말하는 "유명무실한 폐단"은 한 나라가 여러 번으로 분단되는 봉건주의를 가리킨다.

성덕기념회화관 벽화 '폐번치현'(고보리 도모토 필, 사카이 타다마사 백작 봉납). 폐번치현을 포고하기 위해 도쿄에 있는 번지사 56명을 소집한 메이지 천황과 칙서를 읽는 우대신 산조 사네토미. 어장대 왼쪽에 대기하고 있는 왼쪽에서 두 번째 사람은 기도 다카요시, 세 번째는 이와쿠라 도모미.


종합적으로 볼 때, 산조 사네토미는 뛰어난 정치가라기보다는 온화하고 덕망 있는 인물로, 메이지 유신이라는 격동기에 다양한 세력 간의 갈등을 조정하고 통합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인물로 평가할 수 있다.

4. 유산

메구로구 메구로 1초메(현 호텔 프린세스 가든, 부지 일부는 맨션으로 산조엔이라는 명칭이 남아 있음)에 있던 도쿄의 옛 집 이전에는, 교토 고쇼에 인접한 산조 저택 터에 거처가 있었으며, 아버지 사네토미를 모셨던 나시노키 신사에 다이쇼 시대에 합사되었다. 묘소는 도쿄도 분쿄구 오쓰카의 고코쿠지에 있으며, 유발총은 교토시니손인에 있다.

하기시의 묘진 연못에는 조슈 번에 숨겨져 있었을 때의 노래비가 있다. 이노우에 공원에는 사네토미가 사용한 "용미의 물 받이" 등이 남아 있다. 아카마에는 무나카타시의 가라쓰 가도 아카마 역에 한 달 동안 숙박한 기념으로 세워진 "오경 서천의 비"가 있다. 다자이후 텐만구의 엔주 왕원 앞에는 "칠경 몰락" 비가, 저택 내에는 "오경 유적" 비가 있는 등 다자이후시, 지쿠시노시 주변에는 사네토미와 관련된 것들이 남아 있다.

5. 기타


  • 14, 15세 무렵, 공경 자제들 사이에서는 "군사(いくさごと, 전쟁)"라는 놀이가 유행했다. 다른 아이들이 유명한 무장의 문장을 깃발로 사용했지만, 사네토미는 일장기 문장을 사용했다. "해님이 싸움을 하는 것은 이상하다"라는 말을 들은 사네토미는 "이것은 나라의 표시다. 나라와 나라가 군사할 때는 이 표시를 사용해야 한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7]
  • 내각관방 내각 홍보실이 운영하는 총리대신 관저웹사이트에서는 "三條實美"[8]라고 표기하고 있다.
  • 양자였던 킨요시에게는 해외 유학을 시키는 등 보살폈지만, 킨요시는 유흥에 빠져, 여러 번 금전 문제를 일으켰다. 1886년 6월 25일에 폐적했다.
  • 1874년 사이고가 없는 정부의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 보수파 중진 시마즈 히사미쓰가 좌대신이 되어 정부의 서구화 정책을 비판, 철회하려는 움직임을 강화했다. 1875년 히사미쓰는 태정대신의 권한을 좌우 대신에게 넘겨줄 것을 요구했으나 실패했고, 10월 19일 실미를 사직시킬 것을 상주했다. 히사미쓰는 아리스가와노미야 다루히토 친왕에게 재정하도록 하여 사직을 얻어내려 했지만, 궁내경 도쿠다이지 사네쓰네는 우대신 이와쿠라 도모미에게 재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와쿠라는 실미를 지지해야 한다고 상주했고, 히사미쓰의 탄핵은 실패했다. 히사미쓰는 사표를 제출했지만 이와쿠라에 의해 되돌려졌고, 10월 25일 각의에서 정식으로 면관되었다. 우치다 마사카제, 카이에다 노부요시, 나라하라 시게루도 산조를 탄핵했지만, 모두 기각되었다.
  • 히사미쓰가 떠난 후의 정부는 오쿠보 도시미치의 독무대가 되었고, 실미는 그 방침을 거의 지지했다. 1878년 오쿠보가 암살되자 이토 히로부미오쿠마 시게노부가 실력자가 되었지만, 메이지 14년의 정변으로 오쿠마가 하야하자 이토의 독무대가 되었다.
  • 이 무렵 산조가의 가령들이 사업에 실패하여 실미는 막대한 부채를 안게 되었다. 모리 가문의 지원으로 파산은 면했지만, 산조가가 부채를 완납한 것은 1905년의 일이었다.
  • 1885년 태정관제가 폐지되고 내각제도가 발족했을 때 실미의 옛 신하 오자키 미쓰요시는 태정대신 사임을 철회할 것을 실미에게 호소했지만, 국가의 장래를 위해 다른 방책은 없다고 전하며 철회하지 않았다.
  • 내각 제도 이행에 즈음하여, 누가 초대 내각총리대신이 될지가 주목받았다. 모두의 의견이 일치하는 것은, 태정대신으로서 명목상으로나마 정부의 수장이었던 사네토미와, 오쿠보의 사망 후 사실상의 재상으로서 메이지 정부를 이끌며 내각 제도를 만든 이토였다. 그러나 사네토미는 세이카가 출신 공작이었고 이토는 가난한 농가 출신 백작으로 신분 차이가 컸다. 초대 내각총리대신을 결정하는 궁중 회의에서, 이노우에 가오루는 "앞으로의 총리는 외국 전보를 읽을 수 있어야 한다"라고 말문을 열었고,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그렇다면 이토 군 외에는 없다"라고 찬성, 이에 사네토미를 지지하는 보수파 참의도 반박할 말이 없어졌다. 영어 실력이 결정적인 요인이 되어 사네토미는 초대 내각총리대신이 되는 것을 놓쳤다.

5. 1. 가계도

三条家일본어후지와라 북가 칸인류의 적류로, 태정대신까지 승진할 수 있었던 세이카가 중 하나이다.[2]

관계이름비고
아버지산조 사네쓰무
어머니山内矩子|야마우치 노리코일본어도사번주 야마우치 토요카즈의 딸
부인鷹司明子|다카쓰카사 하루코일본어1848년 - 1924년, 관백 다카쓰카사 스케히로의 아홉째 딸
장남킨요시
차남킨테루
삼남가와바타 사네요시
장녀지에코1872년생, 칸인노미야 스케히토 친왕 비
차녀미사코1874년생, 모리 모토아키(공작)의 부인
삼녀아키코1876년생, 오타니 코엔(백작)의 부인
사녀다카코히라마츠 도키요 (자작)의 부인
오녀아쓰코1880년생, 다카쿠라 아쓰마로 자작의 부인
육녀나쓰코사카이 다다오키의 부인
칠녀스에코1888년생, 마쓰나가 야스히코의 장남 야스에의 후처
양자킨타다형 킨무쓰의 아들, 1886년 6월 25일에 폐적


5. 2. 연표

해당년도날짜내용
1850년1월 31일 (가에이 2년 12월 19일)종5위하에 서위됨.
1854년7월 4일 (가에이 7년 6월 10일)종5위상으로 승서됨.
9월 29일 (가에이 7년 8월 8일)시종에 임관됨.
10월 18일 (가에이 7년 8월 27일)원복하고 금색을 하사받아, 승전을 허락받음.
1855년2월 1일 (안세이 원년 12월 15일)정5위하로 승서되고 시종은 이전과 같음.
5월 22일 (안세이 2년 4월 7일)종4위상으로 승서되고 시종은 이전과 같음.
10월 27일 (안세이 2년 9월 17일)우근위권소장으로 전임됨.
1856년1월 29일 (안세이 2년 12월 22일)정4위하로 승서되고 우근위권소장은 이전과 같음.
1862년10월 14일 (분큐 2년 윤8월 21일)좌근위권중장으로 전임됨.
11월 6일 (분큐 2년 9월 15일)종3위로 승서되고, 좌근위권중장은 이전과 같음.
11월 19일 (분큐 2년 9월 28일)권중납언으로 전임됨.
1863년2월 15일 (분큐 2년 12월 27일)조정 내에 국사어용괘가 설치됨에 따라 겸임됨.
10월 6일 (분큐 3년 8월 24일)국사어용괘를 포함하여 해관됨.
1867년1868년 1월 2일 (게이오 3년 12월 8일)종3위로 복위됨.
1월 21일 (게이오 3년 12월 27일)메이지 정부의 기의정에 취임.
1868년2월 2일 (게이오 4년 1월 9일)메이지 정부 (이 해에만, 이하 정부로 함) 부총재를 겸임.
2월 10일 (게이오 4년 1월 17일)정부 외국사무총독을 겸임.
2월 13일 (게이오 4년 1월 20일)정부 외국사무총독을 사임.
2월 24일 (게이오 4년 2월 2일)권대납언으로 전임.
5월 14일 (게이오 4년 4월 22일)좌근위대장을 겸임.
6월 11일 (게이오 4년 윤4월 21일)정부의 제도 개정으로, 부총재에서 보상으로 이동. 기의정은, 의정관인 상국기의정이 됨.
1868년6월 12일 (게이오 4년 윤4월 22일)종1위로 승서되고 권대납언 좌근위대장 보상 기의정은 이전과 같음.
7월 13일 (게이오 4년 5월 24일)우대신으로 전임. 좌근위대장 보상 기의정은 이전과 같음.
1869년6월 22일 (메이지 2년 5월 13일)기의정을 사임.
8월 15일 (메이지 2년 7월 8일)제도 개정으로, 우대신에.
1871년8월 13일 (메이지 4년 6월 27일)신기관백을 겸임.
9월 13일 (메이지 4년 7월 29일)제도 개정으로, 태정대신에.
9월 24일 (메이지 4년 8월 10일)신기관백을 사임.
1876년12월 29일훈1등 욱일대수장을 수여.
1882년4월 11일대훈위 국화대수장을 수여.
1884년7월 7일공작 서작.
1885년12월 22일태정관제 폐지와 내각제도 발족을 받아, 내대신에.
1889년10월 25일내각총리대신구로다 기요타카의 사임에 따라, 내각총리대신을 겸임.
12월 24일제1차 야마가타 내각 발족으로, 내각총리대신 겸임을 해제.
1890년2월제국 의회 발족에 따라, 귀족원 공작 의원에.
1891년2월 18일정1위. 같은 날 사망.


5. 3. 대중문화 속의 산조 사네토미

; 영화

작품명연도제작사배역비고
유신의 교락1928년닛카츠타니 간이치
오무라 마스지로1942년신흥 키네마미마스 유타카
도쿠가와 일족의 붕괴1980년토에이하야시 쇼타로
불타라 검2021년토호시마카와 나오



; 텔레비전 드라마

작품명연도방송사배역비고
풍설1964년NHK카와이 노부오
세 자매1967년NHK스게 칸타로대하드라마
료마가 간다1968년NHK아오야마 테츠야대하드라마
화신1977년NHK나가이 히데카즈대하드라마
구름을 뛰어넘어라1978년TBS코무로 히토시
백호대1986년니혼 TV호리우치 마사미
타바라자카1987년니혼 TV호리우치 마사미
기병대1989년니혼 TV호리우치 마사미
나는 듯이1990년NHK카도노 타쿠조대하드라마
도쿠가와 요시노부1993년NHK우츠기 마코토대하드라마
야회의 끝1997년NHK카도노 타쿠조
료마전2010년NHK이케우치 만사쿠대하드라마
JIN-진- 완결편2011년TBS하루노베 토모야
야에의 벚꽃2013년NHK시노이 에이스케대하드라마
꽃 타오르다2015년NHK우에스기 쇼조대하드라마
세고돈2018년NHK9대 노무라 만조대하드라마
푸른 하늘을 꿰뚫어라2021년NHK카나이 유타대하드라마



; 텔레비전 애니메이션


  • 만화 일본사 (1983년, 니혼 TV) - 목소리: 테라시마 미키오

참조

[1] 문서
[2] 웹사이트 Sanjō genealogy https://reichsarchiv[...] 2010-05-08
[3] 간행물 大正期の常侍輔弼と内大臣--新帝輔弼から元老内大臣兼任方式へ 早稲田大学史学会 2010-09
[4] 아시아역사자료센터
[5] 아시아역사자료센터
[6] 웹사이트 歴代内閣 | 首相官邸ホームページ https://www.kantei.g[...]
[7] 웹사이트 国会図書館サイト https://www.ndl.go.j[...]
[8] 웹사이트 黑田内閣 https://www.kantei.g[...] 内閣官房内閣広報室 1888-04-30
[9] 서적 『伊藤侯,井上伯,山県侯元勲談』
[10] 서적 『大村先生逸事談話』P23
[11] 웹사이트 デジタル版「実験論語処世談」(15) / 渋沢栄一 | デジタル版「実験論語処世談」 https://eiichi.shibu[...] 2021-10-24
[12] 웹사이트 三條公輝 https://jahis.law.na[...] 『人事興信録』第8版 1928-07
[13] 간행물 叙任及辞令 『官報』第307号 1884-07-08
[14] 간행물 彙報 『官報』第1694号 1889-02-25
[15] 간행물 叙任及辞令 『官報』第1928号 1889-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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